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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탯줄이 생명의 근원이며, 탯줄을 통해 조상의 덕이 전해진다고 믿어 소중히 다루어졌다. 또 끊어진 탯줄이 명당 기운을 받으면 아기도 명당 기운을 받는다고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조상들은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과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출산을 돕는 산실청을 만들어서 소중한 생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관리하고 의식을 행하였다.
또한 왕에게는 왕비 외에도 첩인 후궁들이 있었다. 조선 시대 후궁들은 정1품 빈에서 종4품 숙원까지 8단계의 품계를 받았다.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과 출산을 돕는 산실청, 그리고 조선시대 왕들의 후궁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왕손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이란 무엇인가?
조선 시대에 왕손이 태어나면 백자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묻었는데, 이곳을 태실 이라 하고 산을 태봉산이라고 하였다. 또 왕실에서는 탯줄이 국가의 운명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였다.
왕세자 뿐만 아니라, 대군, 공주, 후궁에서 난 딸인 옹주 등 왕손의 탯줄을 모두 태실에 보관 하였다. 그리고 탯줄의 주인이 즉위 하면, 태실에 있는 태항아리를 꺼내고 안팎의 장식을 새로 꾸몄다.
이를 태봉이라 했으며, 태봉의 안팎에는 다양한 석물들이 장식되었다. 그리고 주위에 출입 금지를 알리는 금표를 세워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을 못하도록 막았다.
왕비와 왕세자빈의 출산을 돕는 산실청은 어떤 곳일까?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는 왕비와 왕세자빈이 임신을 하면, 출산 2~3개월 전 내의원에 출산을 위한 임시 기관인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리고 왕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하는 어의와 의녀, 조정의 대신, 출산 후 출산할 때 깔았던 거적자리 등을 일정한 격식에 따라 처리하는 벼슬인 권초관 등을 산실청에 배치해 일하도록 했다.
특히 의녀는 왕비와 왕세자빈 곁에서 대기하면서 몸 상태를 진찰하였고, 만약 몸에 이상이 발견되면 즉시 산실청의 어의에게 보고해야 했다. 출산 할 때 산모 옆에서 출산을 도와 아이를 받아 내고 탯줄을 자르는 일도 의녀가 담당했다.
출산이 끝난 후에도 의녀는 산모와 아이의 몸상태를 확인하여 하루에 서너 번씩 산실청에 보고했고, 산실청에서는 이를 왕에게 알렸다. 출산이 다가오면 산실청에서 산실을 꾸몄는데, 짚과 종이 등을 깔아 산모가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산모가 힘을 줄 때 잡기 위한 말고삐를 천장에 매달았다.
또한 방의 북쪽 벽에는 순조로운 출산을 기원하는 부적인 최생부를 붙였으며, 출산 후 7일이 지나면 산실청을 해체 하였다. 산실청은 왕비의 임신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국가적인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기관이었다. 산실청이 창설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선조 36년 중전의 산실청을 설치하고 의관 3명을 입직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최초 기록이다.
왕의 첩인 후궁에 관하여 알아보자
후궁은 출신에 따라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명문가 출신으로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이 내리어 간택으로 후궁이 된 경우였으며, 이들은 와의 뒤를 이을 자식을 낳기 위하여 궁궐에 들어왔고, 때에 따라서 왕비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제5대 임금인 문종의 현덕왕후, 제9대 임금인 성종의 폐비 윤씨와 정현 왕후,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장경 왕후 등이 이런 후궁에 해당 된다.
또 하나는 궁녀 출신으로, 왕의 총애를 입어 왕손을 낳고 후궁이 된 경우이다. 이 경우 왕의 총애 정도에 따라 그 품계가 달랐다. 제19대 임금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반 장씨는 인현 왕후를 저주한 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지만,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궁녀에서 왕비가 된 인물이다.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해 왕위를 이을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후궁들은 자신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만들기 위해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은 후궁 자신과 왕자는 물론 이들을 지지하는 당파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편 왕이 죽은 후 후궁은 허락을 받아 궁궐 밖으로 나가서 자식들과 함께 살거나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에 모여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또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후궁들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