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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궁궐 건축과 창경궁 그리고 조선의 기록 문화

by Cozze 2023. 12. 5.

목차

    조선의 제15대 임금인 광해군은 어머니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로 서자 출신 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그 후 새로 맞이한 선조의 계비 인목 왕후가 1606년에 영창 대군을 낳자 세자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608년에 선조의 죽음으로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하자 궁궐 건축 사업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광해군은 왜 건축 사업에 미쳤는가 또한 한때 놀이공원이었던 창경궁 그리고 조선의 기록문화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광해군은 왜 궁궐을 지었을까?

    즉위 후 광해군은 궁궐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 선조 말에 시작한 창덕궁 재건 공사를 마치자 창경궁을 다시 지었으며, 경덕궁, 인경궁, 자수궁 등 새 궁궐도 지었다. 1616년에 승려 성지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인왕산에 왕기가 서렸다고 말하자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인경궁과 자수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인조가 경덕궁만 남겨 두고 인경궁과 자수궁을 폐지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궁궐을 짓는 일에 집착한 이유는 임진왜란으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서자였기에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또한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무리하게 궁궐을 짓자, 백성들의 원성이 커져만 갔고, 결국 반정으로 쫓겨났는데, 궁궐을 짓기 위해 지나친 토목 공사를 벌인 것도 수많은 이유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때 놀이공원이었던 창경궁

    창경궁은 순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일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었다. 1909년에 일본은 창경궁 안의 일부 전각들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 등을 지어 궁궐을 일본식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창경궁을 공원의 의미인 창경원이라 부르며, 일반인에게도 개방했다.

     

    또한 일본은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설치하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나무 수천 그루를 궁궐 곳곳에 심어 놓고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창경궁은 그 후로 한참 동안 놀이공원의 모습으로 유지 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창경궁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어 1983년에 동물원의 동물들을 서울 대공원으로 옮기고 벚나무도 제거했다.

     

    일본에 의해 철거되었던 일부 건물도 복원하고, 창경궁으로 이름을 바로 잡아 비로소 우리 궁궐인 창경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창경궁에는 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정문과 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의 궁궐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 하고 있어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국왕의 일기 일성록 그리고 의궤

    일성록은 매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쓴 기록이라는 뜻으로, 정조 때부터 마지막 임금 순종 때까지 150여 년간 왕의 동정과 나랏일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책을 말한다. 일성록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일기인 존현각일기에 많은 기반을 두고 있다.

     

    이처럼 정조의 개인 일기로 출발한 일성록은 기록 방식과 담당자가 변화되고 정리되면서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자리잡았으며, 왕위에 오른 정조는 각종 기록을 집대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국가 의례에 이용된 문장이나 과거 시험의 답안, 신한들의 상소 등을 종류별로 모아 책으로 엮게 하였다.

     

    일성록에는 상소를 비롯하여 왕의 윰은, 왕의 동정, 정치상의 일, 가뭄, 홍수 구호대책,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등에 관련된 사항들이 월일별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성록은 나랏일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 역할을 했다. 또한 역사 기록물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 기록 문화의 꽃, 의궤

    의궤란 의식이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으로,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된 주요 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겨 놓은 책을 말한다. 현재 존재하는 의궤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1600년에 작성된 의인 왕후의 빈전혼전도감의궤와 산릉도감의궤가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궤에는 세자의 책봉 행사 및 결혼, 장례, 궁궐의 건축 등 왕실의 주요 행사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있다. 행사가 있을 때에는 행사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찬수청 등을 설치했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의궤청을 설치하여 행사의 전반적인 사항을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 1부, 의정부, 예조 등의 국가 기관과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등에 보과하는 각 1부 등으로 총 9부 내외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행사의 내용이나 사용 물품 등을 그린 도설, 행사 참가자들의 배치 상황을 그린 반차도, 참가인원 명단, 행사 후 담당자들에게 내린 포상 내역 등을 기록했다.

     

    특히 도설과 반차도 같은 기록화는 행사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전해 주어, 당시의 옷차림과 장신구 등도 살펴볼 수 있었다. 조선 왕조의 의궤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프랑스의 파리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규장각과 장서각의 조선 왕조의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록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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